ETC/한국사

고조선

junius06 2024. 6. 29. 15:46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고조선 건국의 비밀

단군이 세운 나라 이름은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다. 하지만 지배자가 단군에서 위만으로 바뀐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단군조선에 '옛 고古'를 붙였다. 여기에 더해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국명이 중복되어 단군이 세운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고조선은 단군조선부터 위만조선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통칭한다.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랴오양 일대로 볼 수 있다. 이후 연나라와 충돌할 즈음에는 한반도 전역에 비파형 동검에서 발전한 세형동검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왕검성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걸쳐 존재한 고조선은 옆 나라 중국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기원전 3세기경에 중국은 대혼란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 어지러운 시기에 수많은 유이민이 고조선으로 건너오고, 이후 진한 교체기에 또다시 수많은 유이민이 고조선으로 대거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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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

비파형 동검 : 청동기 시대의 칼의 일종으로 만주에서 한반도, 랴오닝성에 걸쳐 출토되고 있는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지배 계층과 집단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조선과 동호의 표지 유물 가운데 하나로 추측된다.

세형 동검 :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동검이다. 기원전 1500년 이후에서 기원 전후에 걸친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표지 유물 중 하나였다.

랴오양 : 랴오닝성에 위치하며 고대부터 요동의 중심지였다. (랴오닝성 랴오양시)

왕검성 : 고조선의 성곽. 도성.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주류설은 현재의 평양지역이라는 설이다.)

 

위만조선과 철기 문화

이 시기에 넘어온 유이민 집단에는 한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는 인물이 있는데, 이가 바로 위만이다. 연나라 출신 위만이 큰 무리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 고조선은 준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조선의 통치자는 왕이라는 칭호를 쓰며 전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누렸다. 어느덧 고조선은 초기 군장국가에서 다음 단계의 국가, 연맹왕국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군장들이 그들의 부족 세력을 통제했기 때문에 왕권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과도기적 단계의 국가 조직이 갖춰져 있었다. 그 예로 고조선의 법률인 '8조법'을 들 수 있다. 전해지는 조목은 3가지뿐이지만, 그 내용을 통해 국가 체계가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한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러나 50만 전을 배상하면 용서한다.

 

고조선으로 이주한 위만은 준왕과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서쪽의 변방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 구역 거주자들을 책임지고 이끄는 과정에서 위만은 점점 세력을 불렸다. 마침내 기원전 192년, 위만은 수도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끌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 찬탈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이 계속 이어졌기에, 고조선의 명맥이 끊긴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위만의 강점은 중국에서 가져온 철기 문물이었다. 강력한 철제 무기가 군사력으로 위만조선을 발전시켰다. 또한 위만은 중국의 한과 남쪽에 있는 진의 중간에서 길을 막고 중개무역을 펼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국력도 왕권도 강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동북아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고조선을 아니꼽게 보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한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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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국가(君長國家, chiefdom) : 혈연관계에 기반하는 전근대 비산업 사회의 정체이다.

8조법(八條法) : 고조선 시대에 있던 8개 조항의 법으로, 한국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법률이다.

 

한나라의 견제와 고조선의 멸망

한나라는 진나라에 이어 중국 역사상 2번째 통일 왕조를 이룩한 강대국이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어떻게 멸망시켰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한나라 내부 상황을 들여다본다.

오래전부터 한나라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흉노족이 툭하면 쳐들어와서 약탈을 일삼는 것이었다.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걸쳐 북방 몽골고원 일대를 휩쓸고 다닌 유목 민족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조차 흉노족이라면 학을 뗄 정도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만리장성 공사에 힘을 쏟은 것도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흉노족은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유목 민족인 흉노에게 침략은 곧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떠돌아다니며 식량원과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그들에게, 황하강 일대의 풍족한 중원 지역은 군침 도는 보물창고와 같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200년, 한고조 '유방'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대적인 흉노족 정벌을 시도했지만 크게 패배했다. 흉노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탓인지 노선을 아예 뒤바꾸었는데, 굶주린 흉노가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조공을 갖다 바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처절한 유화정책이 수십 년 이어지던 중에 한무제가 즉위한다. 한무제는 흉노족에 대해 다시 강경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지만, 말 타고 들판을 휘젓는 무적의 기마민족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한무제는 흉노에게 고통받던 또 다른 피해자, 월지국과 손을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원전 139년, 장건을 월지국으로 보냈다. 장건은 중간에 흉노에게 붙잡혔다가 흉노족 부인에게서 아들까지 얻는 등 온갖 일을 겪고 무려 13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온 장건은 월지국이 한나라와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보고했다. 그러나 장건이 전해준 정보 중에는 한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도 있었다. 흉노가 한나라 비단을 가져다 서역 상인에게 비싸게 팔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래서 한무제는 서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길을 뚫기로 한다. 동서양이 만나는 거대한 실크로드가 개척된 것이다. 돈줄이 막힌 흉노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역의 힘을 깨달은 한무제에게 고조선은 눈엣가시였다. 중개무역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고조선이 곱게 보일 리 었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한다. 그러나 국력이 강한 고조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랜 싸움이 이어지던 중, 고조선의 지배층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항복하자는 의견과 계속 항전하자는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끝까지 싸우려 한 고조선의 우거왕은 결국 반대파의 손에 살해당했지만, 남은 세력은 항전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했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해서 직접 통치했다. 한사군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의 행정구역인데, 이곳을 통해 중국 문물이 흘러 들어왔다. 한사군은 설치된 지 약 30년 만에 3개의 군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낙랑군은 4세기경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는 한반도의 정치 질서를 결정적으로 재편성했다. 이후 한반도 일대에는 새로운 나라들이 등장한다. 그중 일부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해서 한반도의 역사를 주도했지만, 다른 일부는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 한 채 다른 국가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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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宥和政策) : 힘관계에 의한 현상타파를 의도해서 전개되는 적극적 대외정책에 대해 취하는 극히 타협적인 외교정책이다.

실크로드(Silk Road) :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이다.

 

번외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8조법은 고조선 계승 및 문명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법률도 8조에서 60여 조로 늘었다.

 

 


출처: [도서] 요즘 어른들을 위한 최소한의 한국사